미터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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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일반기술.정보

미터법 이야기

by 자동제어기 2024.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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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지난번 프랑스혁명을 시작으로 도량형의 시작에 대한 내용에서 추가되는 내용입니다. 아래 링크자료를 참조합니다. 프랑스의 군사 산업 공학자인 프뢰외르 손에서 이뤄진 미터와 용량 단위 리터 그램 등 정치적 폭풍 속에서도 보편적인 도량형의 재정 작업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도량형의 작업은 사실 많은 비평과 반대가 있었으며 이러한 폭풍 속에서 희생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프랑스혁명으로 민주주의 초석을 시작한 프랑스에서는 거의 모든 혁명의 과정이 그러하듯이 반대파에 대한 보복이 있었습니다. 당시 프랑스혁명당시에 정치청부업자로 민중의 원성을 산 라부아지에가 11월 28일에 체포돼 단두대에서 처형을 당했으며 당시 유력인사들로 보르다, BRISONG 쿨롱, 들랑브르, 라플라스 등의 경우에는 왕에 대해 우호적인 편이라고 하여 프랑스혁명 임시 위원회에서 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의 뒤에는 이들에게 역감을 품은 군사 공학자 프뢰외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도량형 제안에 대해 반대한 이들에게 보복을 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도량형의 경우에는 꼭 필요한 정책이었다는 것이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용

이제 미터법 프로젝트는 프뢰외르의 손에 의해 제작과 배포됐고 M 미터, L(리터), g(그램)의 기초 명칭이 확정하였으며 주요 측정 작업들은 이전에 맡았던 아카데미 회원들에 의하여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공포정치가 끝나자 1795년 말 과학 아카데미는 프랑스 학사원의 일부로 부활하였고 이듬해 4월에 베르돌레, 보르다, BRISSON 쿨롱, 쁠랑 브로, 라플라스, 르장드로, 메센 몽주 등을 중심으로 한 위원회에서 다시 미터 프로젝트가 진행되었습니다. 라플라스는 이를 위한 국제적인 학자의 모임을 주창했다, 나폴레옹의 지지로 영국이 배제된 가운데 일부 학자를 초청하여 이 연합 위원회는 3개 소위원회를 구성해서 작업을 진행하였습니다. 메센과 프랑 브로의 측정치로부터 미터의 길이를 확정하고 부피와 무게의 단위도 확정했습니다. 그리고 1799년 6월 22일에 공식적으로 도량형 표준들이 민중들에게 발표하였으며 이러한 미터법은 지지자들에 의해 프랑스 학사원이 프랑스 공화국뿐 아니라 전인류에게 도량형이라는 거대한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미터법이란 . 도량형

개요METER HISTORY 미터법의 역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미터법의 유래는 고대 물물교환이나 역사시대 이후 제화를 사고파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기준이 애매하여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경우

fasystem.tistory.com

보편성으로 인정받은 국제단위 1872년 연합 위원회를 구성했던 29개국 출신의 학자들은 자국으로 돌아가 미터법을 전파하기 시작하였으며 미터법은 프랑스와 합병된 지역에서 다른 단위를 배제한 채 독점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주변국에서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도 긍정적인 반응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당시  프랑스 내부에서   토지거래는 미터법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에  사람들은 거부했다. 특히 농부나 측량사, 건축담당자들 및 상인들은 기존의 자기들이 사용하던 측정 방법을 고집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였습니다.

도량형 사진
도량형 사진

국가의 강제적 조치는 결국 상용 단위와 공식 단위의 분리를 초래해 생활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결국 오래된 단위의 병용이 허용되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결국 이전의 단위들은 새 단위와 뒤섞여 쓰임으로써 도량형 개혁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혼란이 있었으며 이러한  미터법 제정에서 배제되었던 영국인들의 조롱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미터법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특징과 10진법을 쓰는 이점은 서서히 그것의 사용을 확대시켜나가고 있었고 1800년 이후로 건축 설계에서 미터법이 점점 많이 쓰이게 되었고  옛 단위와 미터법이 병행되던 단계를 넘어서 점점 미터법만이 쓰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다가 1810년경부터 공학 및 기술 서적들은 미터법만을 사용하였고. 당시 교수들과 지식인계층 및 공무원들은 미터법의 사용을 강의 및 공식 문서들에서 전적으로 요구하면서 정착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기타

결국에는 혼란을 잠재우기 위하여 1840년에 프랑스에서는 미터법만을 사용하도록 법을 규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미터법은 보편적인 도량형으로 자리를 굳혀 나가기 시작하였고. 미터법은 정착단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혁명의 과욕 1주일은 10일 이런 식으로 한편 미터법이 제정되는 과정과 더불어 진행된 달력과 시간의 개혁은 미터법과는 다른 이유들이 발생하였습니다. 10진법의 사용이 혁명의 이상에 부합한다는 생각이 팽배해지자 아카데미 회원들은 직각을 1백 등분해 도(度)를 삼고(grad), 도를 1백 등분해서 분(分)을 삼는 식으로 10진법을 각도에 까지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달력과 시간을 교회와 바빌로니아의 전통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각은 혁명의 정신에 잘 부합했습니다. 마침내 1793년 9월 20일에 과학 아카데미는 공공시도위원회에 달력과 시간의 개혁안을 제출했고 이 개혁안은 프랑스에서 공화국이 선포된 1792년 9월 22일을 혁명 년의 날로 삼고 날의 분할에도 십진법을 도입해서 한 달을 균일하게 30일로 하고 10일 단위로 순(旬)을 삼아서 주(週)를 대신하게 하며 1년을 12월로 삼고, 남은 5일 또는 6일은 휴일로 삼자고 했습니다. 또한 하루의 시간도 십진 화해서 하루를 10시간으로 하고 각 시간을 1백 분으로 나누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제안은 곧 입법화됐고 모든 공공 서류들이 새로운 스타일로 날짜를 표기했습니다.

각 월의 명칭에 대해서는 숫자로 하자는 의견도 강했지만 결국 기후에 따른 명칭을 붙이기로 해 9월 22일을 시작으로 해서 가을에는 포도 월(苞萄月), 무월(霧月), 상월(箱月), 겨울에는 설월(雪月), 우월(雨月), 풍월(風月), 봄에는 종 월(種月), 화월(花月), 목월(牧月), 여름에는 맥 월(麥 月), 열월(熱月), 숙월(熟月)이란 이름이 생겼고 요일의 명칭은 1 요일, 2 요일, 3 요일 10 요일로 하였습니다. 이로써 개혁자들은 새로운 혁명력이 특정한 문화를 반영하지 않는 보편적인 달력이 됐다고 만족했습니다. 곧 10진법에 따라 추가 움직이는 시계가 만들어져 아카데미 회원을 중심으로 시범적으로 사용하였고 라부아지에도 그중의 하나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간의 10 진화는 다른 국가와 정보를 교환하는데 난점으로 작용해 실용화되지 못하였으며, 1795년에 그 사용이 유보됨으로써 혁명력 자체의 사용은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혁명력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은 주의 폐지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일주일을 주기로 이뤄져 왔던 사람들의 생활을 10을 단위로 삼은 새로운 주기에 맞추겠다는 당찬 계획은 7일을 주기로 이뤄지는 교회의 의례를 따르지 않음으로써 교회의 지배에서 벗어나자는 혁명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센 반대의 핵심은 교회보다 민중들에게 있었습니다. 이 법안을 따라 공공 업무와 공공시설들은 10 요일에는 모두 쉬도록 조치되었지만 사람들은 7일마다 쉬던 것을 10일마다 쉼으로써 휴일이 1년 동안 52회에서 36회로 줄어드는 것을 싫어했고 결국 교황청과 조정을 이루는 사이에 나폴레옹은 몰락하였습니다. 일주일이 10일이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도량형 미터법. 프랑스는 지금부터 약 200년 전까지 귀족과 평민의 차이가 심했습니다. 귀족은 왕으로부터 아주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고  왕은 일반 백성들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고 무거운 세금만 강요했습니다. 게다가 당시의 자, 돼, 저울, 즉 도량형이란 것이 정확지 못하여 무엇 하나 일정한 것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세금을 내거나 물건을 팔 때, 언제나 불편이 따랐고 서로 이익을 보기 위해 저마다 자기의 잣대를 주장하며 남을 속였습니다. 혼란한 민심은 귀족을 중심으로 하는 왕의 정치에 반기를 들고 1789년 마침내 프랑스 대혁명을 일으켰고 혁명정부는 무엇보다도 우선 도량형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시의 정치가 탈레랑의 제의로 미래에도 영원히 바뀌지 않는 것을 기초로 해서 만들자라고 약속하였던 것입니다. 1791년 프랑스 전국의 대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연 결과로 지구의 북극에서 남극까지의 거리, 즉 자오선의 2천만 분의 1을 단위로 삼자라고 약속합니다. 그리하여 7년간에 걸친 노력으로 자오선의 길이를 측정하고, 이 길이의 2천만 분의 1을 길이의 단위로 1미터'라 명명하였습니다. 이때, 1 미터에 상당하는 길이의 백금 막대를 두 개 만들었고 그중 정확한 쪽을 도(度)의 원기(原器)라고 하고, 후세의 미터 도량형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1m의 십 분의 일의 증류수가 섭씨 4도 일 때의 눈금을 1킬로그램으로 하였다. 다음에 1000㎤ 의 부피를 단위로 하여 1리터라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것은 보통 1리터를 양의 기본단위로 생각하나 1㎥의 부피가 기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피가 너무 크므로 리터가 보조단위인데 거의 기본인 것처럼 사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 한 가지는 도 안에 포함되는 것으로서 넓이의 기본단위는 1㎡이다. 넓이의 단위 중 '아르'는 양의 있어서의 리터와 마찬가지로 기본이 아니라 100평방미터(100㎡)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후 1872년 세계 각국의 위원들이 프랑스 파리에 모여 세계의 도량형을 비교해 보았더니 미터법 도량형이 실용적이고 학술적으로도 편리함이 인정되어 29개국 위원들이 미터법에 따를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지구의 남극에서 북극까지의 자오선의 길이를 다시 정밀하게 잰 결과 2000만 미터보다 1700미터가량 긴 것을 알았고 따라서 1m의 길이는 실제 자오선의 2000만 분의 1보다 약간 짧은 것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지구는 오랜 세월 동안에 크기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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