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터법이란 . 도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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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터법이란 . 도량형

by 자동제어기 2022. 1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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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METER HISTORY 미터법의 역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미터법의 유래는 고대 물물교환이나 역사시대 이후 제화를 사고파는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 기준이 애매하여 사회적 혼란을 일으킨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유럽에서의 미터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길이나 부피, 무게 등을 측정할 때마다 알맞은 단위를 사용하고 있다. 가령 길이에는 ㎝, m, ㎞ 등으로 부피에는 ㎤, ㎥등, 무게에는 ㎎, g, ㎏등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터법 도량형이 발명된 나라는 프랑스로서 약 240년 전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프랑스혁명이 탄생시킨 미터법(the metric system) 미터법 역시 새로운 왕권이 들어서면서 국가적인 개혁으로 실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미터법은 한 국가에서만 사용된 것이 아니라 그 보편성을 인정받아 18세기말에 프랑스에서 제정된 이후 꾸준히 각국에서 채택하기 시작하였고 미터법은 길이의 단위인 미터 즉 잰다는 의미의 그리스어인 매트론 mctron 또는 라틴어 메트룸 metrum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전체 단위의 기초로 삼고 넓이, 부피, 질량의 단위를 규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길이의 단위로서 1 미터는 지구의 북극에서 적도까지의 최단거리를 1천만 분의 1로 나눈 것입니다. 이것을 기초로 넓이의 단위인 아르로 프랑스어 are, 1a=100 제곱미터로 변의 길이가 10미터인 정사각형의 넓이와 부피의 단위인 리터 L로 즉 모서리의 길이가 1미터인 정육면체의 부피의 1000분의 1로 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피의 단위로부터 질량의 단위인 그램이 물의 밀도와 관련돼 만들었고. 4도 온도의 증류수 1L 질량의 1000분의 1을 1g으로 정한 것입니다.

내용

각종 단위의 혼란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길이를 속이고 줄 량을 속이는 등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래는 물론 세금 징수등에서도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사회질서 구축 위한 도량형 18세기말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미터법은 어떻게 이뤄졌으며 그것이 보편적인 단위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확인해 봅니다. 인류사의 커다란 혁명적 변화가 이뤄진 18세기말의 프랑스가 그 시작입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분노한 군중들이 정치범들이 수용돼 있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몰려 가 옥문을 부수고 왕정을 끝내고 새로운 민주시대를 열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전제적인 절대 왕권에 대항한 시민이 정권을 차지함으로써 시민이 주인 된 민주주의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절대권력의 왕족과 귀족, 또한 그에 버금가는 권력을 가진 성직자들 속에서 이뤄진 앙시앙 레짐의 모든 잔재를사회 속에서 몰아내는 것이 혁명가들의 목표였다. 앙시앙레짐은 봉건적 구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새로운 도량형의 제정은 새로운 사회 질서의 구축을 위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당시의 프랑스에서는 봉건적인 구습을 따른 도량형들이 사용됐다. 시장이나 민간거래 정부의 세금 등등 수백수천의 단위들로 민간의 상업 거래 토목이 나건축, 농업, 제조업 경공업 등에서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단위들은 같은 이름이라도 지역마다 그 양이 다르기 일쑤였고 10진법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해서 계산이 매우 어려웠습니다. 도량형은 사물을 계량, 계측하고, 물건을 비교, 교환할 때 기준이 되는 자, 돼, 저울 등을 가리키며. 길이를 재는 자, 부피를 재는 돼 와 말, 무게를 다는 저울은 물물교환이나 거래 시 흔히 사용했던 전통 도량형 단위의 혼란은 당연히 모든 거래와 제도들의 질서를 어지럽힘으로써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은 민주주의 시대에 맞게 도량형 제도의 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프랑스의 측정 기술은 수학과 과학등 자연과학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이었으며 다양한 측정 장치들이 개발되고 개선됨으로써 다양한 양들에 대한 정밀 측정들이 과학자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측량도구들은 거리와 길이를 정확하게 측정했고, 정교하게 제작된 시계는 시간을 이전보다 훨씬 정확하게 측정하였습니다. 또 저울은 미세한 질량의 차이도 감지할 수 있게 해 줬다. 그리고 전하량, 열량, 기체의 부피 등을 측정할 수 있는 장비들이 개발되어 있었고 이러한 과학 기술은 정량적 단계로 한 단계 발돋움할 수 있는 것이 도량형의 표준이었습니다. 프랑스 과학의 발전은 당시 유럽 과학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파리 과학 아카데미에서 주도하였고 과학 아카데미 회원들은 과학사의 잠재력을 국가를 위해 유익하게 쓸 수 있는 예로써 도량형의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도량형 개혁의 주창자들은 새로운 도량형 체계는 임의적이지 않고 표준원기를 잃어버리더라도 쉽게 재생이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무엇보다 합리적이고 보편적이어야 하며 단순해서 사용하기가 편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단순성과 사용의 용이함을 위해서는 10진법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생각이었습니다. 1790년, 아카데미 회원인 탈레랑은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길이의 표준을 북위 45도 상에서 초 단위로 흔들리는 즉 주기가 2초인 진자의 길이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미터법의 유래에 대한 설명 그림
미터법의 유래

기타

모든 개혁의 초창기에는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고 해도 반드시 반대하는 단체나 국가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프랑스의 혁명적인 도량형 기술과정책을 프랑스에서는 영국에 소개하고 초청을 하였지만 영국등에서는 이러한 도량형에 대하여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렇기에 초창기에 영국이 배제된 미터법 초진자의 길이는 이미 1백 년이 넘도록 길이의 표준 단위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초진자의 길이를 길이의 표준으로 삼자는 견해에 대해 영국의 보수적인 과학자들들과 정책담당자들이 반대하면서 이러한 도량형 정책에 대한 제안을 영국 의회에 상정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시대상황에서 프랑스의 혁명이 더욱 격화되면서 양국의 관계는 악화됐고 아카데미가 진자의 길이를 우선적인 단위로 삼지 않기로 결정함으로써 두 나라의 공조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의 국민의회는 탈레랑의 제안을 수락했고 이를 위해 아카데미에 위원들 중심으로 위원회가 구성하였고 1791년 3월에 이들은 진자보다는 파리를 통과하는 지구 자오선의 길이가 더 좋은 표준이 될 수 있다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 이유는 길이의 단위를 결정하기 위해 길이와는 무관한 시간의 단위를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고 초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10진법을 따르지 않는 임의적인 것이기에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초진자의 길이는 그 편리성을 고려해 부차적인 기준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이를 위해 극에서 적도까지의 길이를 측정하는 것은 너무 큰 작업이므로 위도 45도 근방의 호의 길이를 재기로 하였고 초진자의 길이를 관측하기 위한 기준 위도를 확정한 후, 초진자의 길이를 측정했습니다. 이어서 중량의 단위를 측정하기 위해 얼음이 녹는 온도에서 부피를 잰 증류수의 무게를 측정하고 마지막으로 프랑스에서 사용되는 예전 단위들을 세 표준과 비교하는 작업을 수행하기로 결정하였고 프랑스인들은 이 표준들 자체가 자연적인 것이므로 당연히 다른 국가들에서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제안들이 국민의회에 제출되었고 곧바로 승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격동은 이 프로젝트에 일대 시련으로 다가왔다. 1793년 자코뱅당이 정권을 잡고 이른바 공포정치가 실시되면서 과학아카데미의 엘리트주의에 반감을 품은 세력에 의해 아카데미는 8월 8일에 폐쇄되고 말았다. 다음 내용은 추가 포스팅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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